
“좋은 제도는 나쁜 사람을 통제하고, 훌륭한 사람에게는 더 큰길을 열어준다.”
몽테스키외의 이 말은 지금 한국의 지역문화재단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적확하다. 정치와 행정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현장은, 제도의 미비가 곧 조직의 위기로 직결됨을 보여준다. 독립성과 책임성 모두를 잃은 채 흔들리는 문화재단은 이제 법과 제도의 리셋을 요구받고 있다.
지역문화재단은 형식상 비영리재단법인이지만 운영은 지자체 예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기관장은 지자체장이 임명하거나 이사장을 겸직하는 구조가 관행으로 굳어졌고, 지방의회는 예산 심의를 무기로 노골적 간섭을 한다. 애초 「지역문화진흥법」이 지향했던 ‘지역 자율형 문화정책’은 선언에 머물렀다.
실제 현장은 이러한 부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2022년 한 기초재단에서는 전직 지자체장이 대표이사로 임명되자 ‘정치적 낙하산’ 논란이 불거졌다. 공모 절차를 거쳤다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배경은 자율성 훼손의 상징이 되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대표이사가 장기간 공석으로 방치되다가 결국 문화 경력이 전무한 인물이 ‘비상임·무보수 대표’로 선임되었다. 조직은 전문성을 상실했고, 문화재단은 행정의 잔여 자리로 전락했다.
전북문화관광재단 사례도 정치와 행정 개입의 민낯을 드러냈다. 인사 문제를 두고 도의원 발언과 노조 반발이 충돌하면서 시위와 고발 검토까지 이어졌다.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를 본 것은 결국 현장 예술인들이었다.
문화도시 사업은 더욱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부산 영도는 주민이 참여한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해 전국적 주목을 받았으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사업 종료를 선언했다. “약속을 저버린 행정”이라는 비판이 지역사회에 퍼졌다. 원주에서는 지원 조직이 일방적으로 해촉 되었다가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관계망은 붕괴되었다. 문화자치의 기반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 사례들이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제도적 허약성 속에서 자율성을 상실하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고, 책임성이 결여되면 시민 신뢰는 추락한다. 따라서 개혁은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 개편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기관장 인선과 이사회 구성은 독립적 절차로 보장되어야 한다. 공모제와 추천위원회를 의무화하고, 이사회는 외부 전문가 비율을 최소 50% 이상으로 해야 한다. 지방의회나 공무원의 부당 개입을 막는 조항을 「지역문화진흥법」과 지자체 조례에 신설하여야 한다. 정치적 압박을 구조적으로 차단하지 않으면 자율성은 공허하다.
둘째, 공익법인으로서의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재단은 회계보고를 정기적으로 공개하고, 성과 평가도 집행률이 아니라 시민 참여와 공감도 같은 사회적 지표로 전환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미 지역문화기금을 독립 이사회가 감독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한국도 투명성과 신뢰를 담보할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다.
셋째, 해외 혁신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 영국 아트카운슬은 정부와 거리를 두고 정치적 중립을 보장받으며, 일본은 중앙–지방 권한 분산을 제도화하고 문화청 산하 기금을 통해 자율성을 유지한다. 한국도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와 한국광역문화재단연합회에 정책 협의 파트너로서 법적 지위를 부여해, 연구·연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내부 혁신도 병행해야 한다. 공공성·시민성 교육을 정례화해 직원들의 사명감을 회복시키고, 행정과 정산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현장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시민과 예술인이 체감할 수 있는 공공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한비자는 “법은 군주가 죽어도 남는다”라고 했다. 특정 단체장이나 정권의 의중이 아니라, 법과 제도가 문화재단을 지탱해야 한다. 자율성과 책임성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문화재단은 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시민 앞에 책임지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지역문화재단의 미래는 행정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다. 정치적 이익이 아니라 시민의 신뢰와 예술인의 창의성이 중심이 될 때, 문화재단은 회복의 길로 나아간다. 법 몇 줄, 시스템 몇 칸, 그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최소한의 상식이 그 출발점이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인생3모작 전문가】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LH인재개발원 미래설계지원센터장, 국토교통인재개발원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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