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쿵, 그리고 정적.”
드라마 〈트리거(Trigger, 2025)〉 속 한 장면. 평범한 고등학생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상급생을 향해 총을 겨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엔 공포보다 안도감이 먼저 스친다. 방아쇠 본능—힘이 불평등을 뚫는 순간 느끼는 원초적 충동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카타르시스는 잠깐의 위안을 주지만, 결국 공동체 규범을 무너뜨리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는 역설을 낳는다.
〈트리거〉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무력 판타지가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선택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대중 서사는 보통 법·제도·정의를 통한 권력 역전을 다룬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법도 제도도 무력화한 채, 오직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물리력으로 판을 뒤집는다. 그것은 억눌린 자가 강자를 향해 위협하는 위협의 해방감이며, 동시에 ‘이 한 발이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역전의 착시다.
왜 지금 한국에서 이런 서사가 울림을 줄까.
첫째, 불평등 구조의 고착화다. 부와 기회의 사다리가 끊긴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제도권의 승리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둘째, 관계적 폭력의 일상화다. 학교·직장·온라인에서의 모욕과 혐오가 쌓이면서, 힘으로 질서를 바꾸는 욕망이 잠재된다. 셋째, 빠른 해결의 환상이다. 긴 싸움과 절차 대신 단 한 번의 ‘방아쇠’로 모든 것이 뒤집히는 단순한 결말에 매혹된다.
해외에도 무력 판타지는 존재한다. 미국의 액션물은 종종 ‘총과 정의’를 동일시한다. 일본의 만화·영화는 개인의 복수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서사에 강하다. 그러나 한국형 무력 판타지는 다르다. 여기에선 ‘영웅’도 ‘사명’도 없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한 번쯤 쏘고 싶은 순간을 실현한다. 이 일상성과 무심함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문제는 한 발 민주주의다. 총성이 대화를 대체하고, 위협이 설득을 압도하는 사회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무력에 의한 권력 교체는 오래가지 못했고, 새로운 불평등과 폭력을 낳았다. 물리적 역전은 잠시의 해방감을 줄 수 있으나, 구조를 바꾸진 못한다. 오히려 ‘힘이 곧 정의’라는 왜곡된 신념만 남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 법과 제도의 신뢰 회복이다. 판결과 수사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법 적용의 형평성을 강화하는 것은 사법기관의 생존 조건이다. 이를 위해 불공정하거나 편향된 법 집행이 확인될 경우, 별도의 독립 사정기관이 조사하고, 해당 판·검사 및 수사관에게는 엄격한 패널티와 자격 박탈을 부과해야 한다. 잘못된 공권력 집행에 대한 실질적 책임 부여가 있어야만, 국민이 법을 ‘신뢰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법원 판결문을 전면 공개해 판결 이유를 누구나 쉽게 검증하도록 하고, 기소·불기소 판단에도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시민감시단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유전무죄’라는 사회적 냉소를 줄이는 출발점이다.
둘째, 행정 대응의 속도와 실효성이다. 스토킹·가정폭력·직장 내 괴롭힘 등 반복 범죄에 대해선 사건이 접수되는 순간, 실시간 위험도 평가와 즉각적 보호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 예컨대 경찰·지자체·법원이 공유하는 ‘위기 경보 시스템’을 만들어 접근금지 명령을 위반할 경우 즉시 위치추적과 긴급 출동이 가능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범죄자가 ‘무서운 공권력의 집행’을 실감하도록 강력한 구속과 신속 재판을 제도화해야 하며, 현행 접근금지 위반에 대한 실형 선고 기준도 상향해 반복 위반자는 즉시 구속하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피해자의 안전은 행정 절차가 아니라 ‘즉시성’이 지켜야 한다.
셋째, 사회적 안전망과 분노 관리 시스템 구축이다. 경제·심리·관계의 복합 위기 신호를 조기에 포착해 상담·치료·중재로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영국의 ‘커뮤니티 세이프티 파트너십’은 지역 단위에서 경찰·의료·복지·시민단체가 상시 협력하는 모델로, 범죄율을 일정 부분 낮추는 성과를 거뒀으나, 참여 기관 간 정보 공유의 한계와 지방 재정 의존도가 높다는 문제도 지적됐다.
한국에 적용한다면 중앙정부 차원의 안정적 예산 지원과, 개인정보 보호를 지키면서도 실질적 위험 정보를 신속히 교환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지역 협의체의 유명무실화를 막기 위해 정례 회의·성과 공개를 의무화하며, 불이행 기관에는 예산 감액 등 실질적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 분노 관리 프로그램을 학교·군대·기업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하고, 위기 가구에 심리상담을 의무 지원하는 법제도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트리거〉의 방아쇠는 허구 속에서만 울린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우리는 매일 보이지 않는 방아쇠를 손에 쥔다—그것은 말, 글, 표정, 투표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방아쇠가 향하는 방향이다. 위협의 해방감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구조를 바꾸는 힘으로 진화시킬 것인가. 우리 사회는 지금, 그 선택의 순간에 서 있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인생3모작 전문가】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기관, 중앙부처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기사제보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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