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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천성진성 제6차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 개최

8.11. 13:00, 가덕도 천성진성 발굴 현장에서 ‘천성진성 제6차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 개최

 

(정도일보) 부산박물관은 내일(11일) 오후 1시 가덕도 천성진성 발굴 현장(강서구 천성동)에서 ‘천성진성 제6차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는 천성진성 6차 발굴조사의 내용과 성과를 다각도로 검토하고, 후속 조치 및 향후 발굴조사에 대해 논의하고자 마련됐다.

 

천성진성(天城鎭城)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로 진격하기에 앞서 전초기지로 활용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사량진왜변(1544) 이후 남해안 일대 수군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중종 39년(1544)에 가덕진과 함께 축성됐으며, 거제도의 동북부 해안과 진해만의 동쪽 지역을 관할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뿐 아니라, 남해안 일대 조선시대 수군진성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부산시기념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부산박물관은 천성진성 유적 보호 및 정비·활용을 위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2016년부터 연차 발굴을 진행 중이다.

 

올해 4월 4일부터 시작한 제6차 발굴조사는 천성진성의 증축구역에 대해 최초로 실시된 정밀 발굴조사로, 주요 성과로 처음으로 성벽의 윗면과 안팎 측면을 완전히 노출·조사해 성벽의 정확한 축조 방법과 순서를 밝혀냈다.

 

천성진성은 큰 장방형과 작은 장방형이 결합된 다각형 구조다. 중종 39년(1544년)에 큰 장방형 형태로 성을 처음 축조했고, 이후 동쪽에 성벽을 덧대어 작은 장방형의 면적을 넓혔는데 이곳이 증축구역이다.

 

조사구역은 증축구역 동벽의 남쪽 3분의 1지점이며, 이곳에는 치성(雉城,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 바깥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물)이 설치돼 있다.

 

이 성벽은 약 2.4미터(m) 너비로 체성(体城)을 쌓은 후 안쪽으로 너비 7m 규모의 등성용(登城用) 계단을 쌓고, 계단 좌우로 단을 일정 너비만큼 덧붙이면서 단차를 형성한 층단식 구조로 내벽(內壁)을 축조했다. 치성은 등성용 계단이 위치한 바깥쪽 벽에 설치됐는데, 체성 축조 이후에 별도로 덧붙였음이 확인됐다.

 

조사원인 김유정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사에 착수할 때는 체성과 치성이 일체로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번 조사를 계기로 복잡한 성벽 축조 양상이 밝혀져 의외의 조사 성과를 거뒀다”라며, “덕분에 아직 확인되지 않은 동문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여전히 검토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증축구역의 용도와 증축 시기를 파악했다. 조사 결과, 당초 완만한 경사지였던 이곳을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약 2미터(m) 정도 단차가 있는 2단의 평탄지로 조성했음을 알아냈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대지에서는 도랑 유구(遺構) 3곳, 구덩이 2곳, 유공석(有孔石) 등이 조사됐다. 유공석은 내진성능을 갖춘 주춧돌 또는 문을 고정하는 확돌과 유사하다.

 

증축구역이 목마장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추정된 바 있으나, 여러 정황 증거들을 통해 목마장 외 다른 용도로 활용됐는지를 추가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 자기, 와전 등이다. 기와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며, 성 내부공간에서 출토된 자기류들도 주로 17~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로 확인된 증축구역의 중심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천성진성이 진해 안골포로 이동됐다가 효종 9년(1656년)에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는 문헌기록의 시점과 부합한다. 이번 조사를 통해 증축구역의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높다.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은 “제6차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천성진성 증축구역의 정보로 새로운 연구가 가능하게 됐다”라며, “학술자문회의를 통해 천성진성의 실체가 다각도로 검토되길 기대한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