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알고 마시면 더 깊어지는 인생

 


 

[이상수 칼럼] 9월의 첫날에 달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이 느끼는 계절의 결은 사뭇 달라진다.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모서리는 제법 뭉툭해졌고 그 끝에는 가을 특유의 선선함과 깊이가 묻어난다. 이처럼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문턱에 서면 자연스럽게 따뜻한 음료 한 잔이 그리워진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가만히 온기를 느끼는 일은, 다가오는 새로운 계절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마시는 일과도 같다.


커피는 참으로 묘한 매력을 지닌 음료다. 첫 맛은 씁쓸하지만 돌아서면 자꾸만 생각나고, 뜨거운 음료임에도 가슴 속 유난했던 소란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바쁜 현대인에게 커피는 매일 무심하게 마시는 일상적 관성에 가깝지만, 사실 커피 한 잔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기다림과 역사,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숨결이 숨어 있다. 알고 마시면 커피의 맛과 향이 한층 깊어지듯, 우리네 삶 역시 그 배경과 맥락을 이해할 때 비로소 풍성해진다. 커피 한 잔을 매개로 우리 삶의 의미를 가만히 짚어본다.


1. 관찰과 호기심이 발견한 새로운 세계
커피의 유래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설화는 6~7세기경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 지방의 목동 ‘칼디’ 이야기다. 칼디는 자신이 돌보던 염소들이 붉은 열매를 따 먹은 뒤 평소와 달리 활력 있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소한 변화였지만, 성실하고 호기심 많은 목동은 그 열매를 직접 끓여 마셔보았다. 그러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이 열매는 밤기도 중 찾아오는 졸음을 쫓으려는 수도사들에게 전해지며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낯선 열매를 경계해 불 속에 던져버렸으나, 불에 타며 피어오른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수도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타다 남은 열매를 물에 우려 마시면서 오늘날 커피의 형태가 갖춰졌다.


커피의 시작에는 주변을 유심히 바라본 한 사람의 따뜻한 관찰과 호기심이 있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을 바꿀 커다란 기회나 새로운 길은 처음부터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작고 소소한 변화 속에서 가치를 발견해 내는 눈, 그것이 바로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


2.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삶의 매개체
에티오피아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커피는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은 조금씩 달라도 커피가 가진 끌림은 국경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역시 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황제가 처음 접한 이후, 근대화 과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제는 누구나 쉽게 즐기는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커피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아침 출근길을 일으켜 세우는 동반자이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어색함을 깨어주는 고마운 핑계가 된다. 홀로 생각에 잠겨 지친 마음을 추스를 때도 커피는 늘 곁을 지킨다. 결국 커피 한 잔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이는 작은 탁자와 같다. 마주 앉아 커피를 나누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며 삶의 온기를 교환한다. 단단하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커피는 타인에게 다가가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매개체가 되어주고 있다.


3. 존재의 뿌리를 이해하는 깊은 시선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예멘의 모카,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 하와이의 코나처럼 커피는 저마다 태어난 토양과 기후, 그리고 고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향미를 품는다. 어떤 흙에서 자랐는지, 어떤 바람을 맞았는지에 따라 산미와 바디감, 향의 스펙트럼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말하자면 커피에도 분명한 ‘고향’이 있는 셈이다.


커피의 고향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사람 역시 저마다 지나온 환경과 토양이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현재 단면만 보고 그 존재를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어떤 시련의 바람을 견뎌냈는지, 또 어떤 아픔을 지나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될 때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시선도 비로소 깊어지고 따뜻해진다.


커피의 풍미를 결정짓는 것이 그 열매가 견뎌낸 토양과 시간인 것처럼, 한 사람의 인품과 깊이 역시 그가 통과해온 삶의 궤적에서 비롯된다. 존재의 뿌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4. 쓴맛 뒤에 찾아오는 향기로운 기다림
커피에는 사랑과 기다림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도 전해진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밤낮으로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여인의 무덤가에 피어난 꽃과 열매가 바로 커피였다는 이야기다. 커피가 쓴 것은 기다림의 눈물 때문이고, 잠을 쫓는 것은 밤새 사람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며, 그 그윽한 향기는 품어온 마음이 향기 되어 퍼진 것이라고 한다.


비록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일지라도 이 비유는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소중한 가치들은 결코 달콤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도, 성공도, 인격의 완성도 반드시 씁쓸한 기다림과 시련의 순간을 통과해야만 깊은 향을 발한다. 인생의 쓰라린 순간을 버텨낸 사람만이 삶이 주는 진정한 단맛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커피의 꽃말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라고 한다. 기쁜 날의 환호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들고 고단한 날에도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커피 한 잔처럼, 삶의 무게를 함께 견뎌주는 묵직한 존재야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일 것이다.


5. 9월, 한 잔의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9월의 첫 아침, 오늘 커피 한 잔을 마신다면 평소보다 조금만 더 천천히 음미해 보기를 권한다. 잔을 들기 전 가만히 향을 먼저 맡고, 따뜻한 머금음 속에서 입안에 퍼지는 맛의 결을 차분히 따라가 보자. 이 작은 잔 하나가 먼 나라의 붉은 흙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의 손길과 땀방울을 거쳐 지금 내 손에 놓이기까지의 여정을 떠올려 본다면, 매일 무심코 마시던 커피 한 잔도 결코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알고 마시면 커피의 맛이 한층 깊어지듯, 사람도 그 삶의 내력을 알고 만날 때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다. 쓴맛을 지나봐야 단맛의 고마움을 알고, 무더웠던 여름을 아쉽게 보내주어야 찾아오는 가을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지나온 삶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이 계절, 오늘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처럼 주변 이들에게 은은하고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풍성한 9월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