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5장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중 일어난 삽화적 내용으로, 미온의 부자 나발이 다윗 일행을 박대하지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중재로 일이 해결되는 장면이다. 이후 나발은 갑자기 죽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된다. [사무엘이 죽다] 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다윗과 아비가일]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5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
어제 영화 〈암살자(들)〉을 보러 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이라는 슬픈 역사적 사건을 놓고 기자와 경찰이 하나씩 의문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긴장감이 있었고,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유신과 긴급조치, 언론 통제와 자유언론실천선언 등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사건과 교차시키는 구성은 실제 역사와 영화적 창작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보는 내내 마치 사실처럼 다가왔다. 그러면서 영화는 비표가 없는 문세광이 행사장에 들어가는 과정에 경호실이 개입하는 설정, 진실을 말해 달라는 사람에게 경호실장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중앙정보부가 문세광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전제, 그리고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상황까지 영화 곳곳에서 정부 관계자들의 폭력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의문을 만들어냈다. ‘이 사건에는 배후가 있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감추는 자, 은폐하는 자가 범인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이야기의 바닥에 깔아놓는다. 특히 사형선고를 받고 가는 문세광을 바라보는 유연석 배우의 마지막 장면은 ‘조총련이냐, 중앙정보부냐’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듯했다. 영화는 여러 가
[이상수 칼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면 “소가 웃을 일이다”라고 한다. 소가 웃으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소가 웃을 일이 많다. 화가 이중섭은 소를 즐겨 그렸다. 그의 소는 때로 거칠고 힘이 넘치며, 때로는 슬픔을 머금고 있다. 나는 이중섭이 그린 소를 보며 문득 생각한다. 이중섭은 어쩌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을 바라보며 소를 그린 것은 아닐까. “소를 그리는 것보다 용을 그리기가 쉽다”는 말이 있다. 용은 아무도 본 적이 없으니 조금 이상하게 그려도 틀렸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소는 다르다. 누구나 보았고 누구나 안다. 다리가 몇 개인지, 눈과 코가 어디에 붙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소를 그리는 순간부터 시시비비가 시작된다. 사람 사는 일도 이와 닮았다. 용은 쉽고 소는 어렵다 모르는 것은 말하기 쉽다. 보지 못한 세계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매일 마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가까이 다가가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 곳의 진리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도피 생활을 하던 중에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지만 왕을 헤치지 않는다. 이 일로 인새 사울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 주다]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사무엘상 23장에서 다윗은 사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성읍 사람들의 고발로 고단한 도피 생활을 계속한다. 다윗은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로, 십 황무지에서 다시 마온 황무지로 도핀한다.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하다]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
[이상수 칼럼] “세상은 왜 이래.” 한때 한 유명 가수가 이 말을 맛깔스럽게 노래하자 사람들은 웃으며 따라 불렀다. “그래, 세상은 왜 이래.” 아침마다 뉴스를 펼쳐도 비슷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말이 넘쳐난다. 내 잘못은 사정이고 남의 잘못은 잘못이라는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일상어가 됐다. 서로의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열심인데 정작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인색하다. 정치는 사회의 몸이라면 종교는 그 몸을 움직이는 마음과도 같다. 몸이 멀쩡해도 마음이 흔들리면 걸음이 흔들린다. 마음이 방향을 잃으면 몸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겪는 혼란 앞에서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종교의 방향과 목적부터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종교는 목적이 아니라 길이다 종교의 본래 목적은 사람을 종교인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데 있다. 하늘과 땅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말도 결국 사람에게 사람다운 도리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믿음의 끝에는 삶이 있어야 한다. 믿어서 도를 얻어야지, 교리를 얻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무엘상 22장에서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도망쳐 나와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온다. 한편, 다윗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은 다윗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놉의 제사장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은 요나단과 작별을 하고 사울의 칼을 피해 정처 없는 도피자의 신세가 된다. 먼저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도 피신했다가 이후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한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다]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접경지역의 한계를 넘어 대한민국 미래산업의 중심으로 국가균형발전은 대한민국이 풀어야 할 오랜 숙제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와 산업, 자본을 전국으로 분산하고 지역마다 자생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그러나 균형발전을 단순히 수도권의 기능을 지방으로 옮기는 문제로만 바라본다면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산업을 어디에 배치하고, 어떤 지역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경기북부 연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천은 오랫동안 접경지역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안보를 위해 각종 제약과 불편을 감내해 온 지역이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제한돼 왔다면, 이제는 국가가 그 희생에 응답할 차례다. 연천을 단순한 규제의 공간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산업을 키워 낼 전략적 거점으로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규제의 대상에서 국가전략의 공간으로 연천은 서울과 수도권 주요 도시로의 접근성을 갖추고 있으며, 임진강과 한탄강을 비롯한 자연환경과 비교적 넓은 개발 가능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조건만으로 첨단산업이나 바이오산업의 성
세상에는 공짜처럼 보이는 것이 참 많다. 길가에 저절로 피어난 꽃도 그렇고, 아침마다 아무 대가 없이 떠오르는 햇빛도 그렇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꽃 한 송이도 긴 겨울을 견뎌야 피고, 열매 하나도 비와 바람을 견디며 익는다.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종종 노력은 적게 하고 결과는 크게 얻고 싶어 한다. 힘들이지 않고 성공하고 싶고, 대가를 치르지 않고 좋은 것을 얻고 싶어 한다. 바로 그 순간 ‘공짜’라는 달콤한 손짓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공짜는 처음에는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은 때로 공짜로 얻은 것이다. 공짜에는 보이지 않는 대가가 있다 공짜라고 받아 든 물건에는 보이지 않는 조건이 따라붙기도 한다. 쉽게 얻은 돈은 쉽게 사라지고, 쉽게 얻은 명예는 쉽게 흔들린다. 노력 없이 얻은 자리는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고, 대가 없이 얻은 관계는 작은 어려움에도 금세 끊어진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서 상대가 먼저 다가오기를 바라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나를 이해해 주기를 기대한다면 관계는 오래가기 어렵다. 받는 것만
사무엘상 20장에서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과는 달리 변함없는 우정으로 다윗과 언약을 맺는다. 하지만 사울 왕의 살해 의도가 변함없자 결국 요나단은 다윗을 멀리 피신시킨다. [요나단이 다윗을 돕다]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6 네 아버지께서
“하늘은 듣기를 좋아하고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한다.” 사람은 하늘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하늘이 침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침묵하는 쪽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기 목소리에 익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믿는 순간 귀는 열려 있어도 들을 수 없게 된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은 아니다 사람의 말에는 마음이 담긴다. 사랑에서 나온 말과 자기 이익을 위해 내뱉는 말은 같은 소리라도 그 내용이 다르다. 자기 합리화와 이익을 위한 말, 타인을 비난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말은 소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방어의 본능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오늘날 세상에는 말이 넘친다. 방송과 인터넷, 사회관계망에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이 쏟아진다. 그런데 정작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너가는 말은 귀하다. 말은 많지만 마음은 없는 세상이다. 서로가 자기 말을 하기 바쁘니 남의 말을 들을 틈이 없다. 하늘의 말도 마찬가지다. 마음으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하늘이 아무리 말해도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들린다. 하늘은 소리 없이 말한다 사람은 입으로 말하지만 하늘은 반드시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우주는 질서와 이치로 말하고 자연은 존
어제 영화 〈암살자(들)〉을 보러 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이라는 슬픈 역사적 사건을 놓고 기자와 경찰이 하나씩 의문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긴장감이 있었고,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유신과 긴급조치, 언론 통제와 자유언론실천선언 등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사건과 교차시키는 구성은 실제 역사와 영화적 창작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보는 내내 마치 사실처럼 다가왔다. 그러면서 영화는 비표가 없는 문세광이 행사장에 들어가는 과정에 경호실이 개입하는 설정, 진실을 말해 달라는 사람에게 경호실장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중앙정보부가 문세광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전제, 그리고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상황까지 영화 곳곳에서 정부 관계자들의 폭력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의문을 만들어냈다. ‘이 사건에는 배후가 있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감추는 자, 은폐하는 자가 범인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이야기의 바닥에 깔아놓는다. 특히 사형선고를 받고 가는 문세광을 바라보는 유연석 배우의 마지막 장면은 ‘조총련이냐, 중앙정보부냐’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듯했다. 영화는 여러 가
사무엘상 19장에서 사울 왕은 다윗의 명성을 질시해 다윗을 공개적으로 죽이려 든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딸 미갈은 다윗을 보호해 주고, 하나님께서도 라마에서 다윗을 보호하신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 1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
사무엘상 18장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꺾은 이후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뜨거운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의 명성을 질시한다. 그런 와중에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을 한다.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울이 불쾌하여 다윗을 주목하다]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