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이상한 나라

 

 


[이상수 칼럼] 조선 시대 야담집인 《어우야담(於우野談)》을 보면 시골 선비가 한양에 와서 겪은 황당한 일화가 나온다. 과거시험장에 벼루와 붓을 챙겨 전력질주를 했는데, 막상 시제(詩題)를 받기도 전에 낙방자 명단이 나붙었더란다. 선비가 기가 막혀 "어찌 글도 쓰기 전에 떨어뜨리는가" 하고 따지니, 시관(試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네 걸음걸이를 보니 급급(急急)하여 군자의 도가 없더군" 하더라는 이야기다. 미리 정해둔 결론을 향해 절차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옛 과거마당의 해학 섞인 풍자다.

 

인류학자들은 한국인을 가리켜 ‘바람의 민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바람이 나면 지구촌을 들썩이게 만들지만, 한 번 칼바람이 불면 물불을 안 가리는 극단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지금 세계를 뒤흔드는 ‘한류(韓流)’는 그 신바람의 결정판이다. 노래 한 자락, 드라마 한 편으로 만방의 사람들을 울리고 웃긴다. 문화라는 것은 본디 내 것을 쪼개어 상대를 기쁘게 하겠다는 상생(相生)의 이타심에서 피어난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너를 춤추게 하겠다는 비움의 미학이 있으니 하늘도 돕고 세계도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다. 이 위대한 신바람의 민족이 어찌하여 여의도 정치판만 가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냥 시공간을 초월한 망신살을 뻗치는가 말이다. 정치는 문화와는 거꾸로 걷는다. 상대를 기쁘게 하기는커녕, 상대를 울려서라도 내 주머니를 채우겠다는 채움의 독식(獨食)이다. 웅숭깊은 맛은 간곳없고 오직 내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조급증만 가득하다.

 

옛 속담에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쓰지 못한다’고 했다. 옷을 기우려면 바늘귀에 실을 꿰어야 하는 법이고, 밥을 먹으려면 뜸이 들기를 기다려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도 마찬가지다. 투표가 시작되면 차분히 표를 모으고, 문을 닫은 뒤에 뚜껑을 여는 것이 삼척동자도 아는 이치다.

 

그러나 최근 이 땅에서 벌어진 선거 풍경은 외신 기자들의 눈을 비비게 만들었다. 투표를 하겠다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줄을 선 백성은 넘쳐나는데 정작 찍을 종이가 없단다. 한술 더 떠, 용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저쪽 방에서는 벌써 주사위를 굴려 개표를 시작했다니, 이것은 이조(李朝) 시대 타락한 과거마당에서도 보지 못한 초유의 기담(奇談)이다. 바늘 허리에 실을 묶다 못해 아예 바늘을 부러뜨려 옷을 꿰매겠다는 심보다. 당선이라는 단 가마솥을 먼저 차지하겠다고 불도 지피기 전에 숟가락부터 들이민 꼴이니, 이를 지켜본 세계 언론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선거’라며 손가락질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쯤 되면 양반고을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선거가 끝나면 앙금을 씻고 ‘화쟁(和諍)’의 마당이 펼쳐져야 하거늘, 도리어 불신과 의혹의 불씨를 국민의 가슴에 던져 갈등을 부추긴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밤마다 청심환을 마시며 정치를 걱정하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세상이 되었다. 밤을 새우며 나라를 걱정하는 주권자들은 정작 고국 땅에서 이방인처럼 소외감을 느끼며 한숨을 쉰다.

 

영국의 문필가 월터 배젓은 "한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 국민의 평균 수준"이라 했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인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 모자랐다면 문화적 융성도 없었을 터, 이는 국민의 탓이 아니라 권력의 화인(火印)이 찍힌 정치인들이 국민의 높은 민주의식을 따라오지 못하는 탓이다.

 

그러니 잠 못 이루는 주권자들이여, 가슴을 펴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시라. 기막힌 세태 앞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그대들의 눈물겨운 정성은 결코 헛된 방황이 아니다. 먼 훗날 우리가 사랑하는 후손들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 나라, 부끄럽지 않은 일류 국가를 물려주기 위해 가슴을 치며 고뇌했던 그 밤의 기도는 이미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거룩한 주춧돌이 되었다.

 

정치인들이 망쳐놓은 진흙탕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끝내 침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밤잠을 설쳐가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국민들의 보이지 않는 조국 사랑이 대지(大地)의 든든한 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이며 위대한 등불이다. 정치는 이제 그만 탐욕의 과욕을 버리고 국민을 섬기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라. 세계를 감동시킨 한류의 상생 정신으로 정치의 헝클어진 바늘귀를 바로 꿸 때, 우리는 비로소 ‘이상한 나라’의 오명을 벗고, 후손만대에 빛날 찬란하고 정상적인 대한민국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