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칼럼]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면 밥맛이 떨어진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밥상에 앉아서도 정치 이야기요, 술잔을 기울여도 정치 이야기다. 싫다면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이 정치인 모양이다. 옛날 시골 장터에서는 소값 흥정으로 얼굴을 붉혔지만, 요즘은 좌냐 우냐를 놓고 목소리를 높인다. 소는 팔고 나면 끝이지만, 정치는 팔아도 끝이 없으니 참 묘한 장사다.
한자에는 그런 인간 세상을 비웃듯 숨겨놓은 지혜가 있다. 왼 좌(左) 자를 보면 ‘공(工)’ 자가 들어 있다. 공은 장인의 망치 소리요, 무언가를 다듬고 만드는 정신이다. 반면 오른 우(右) 자 밑에는 ‘입 구(口)’가 자리 잡고 있다. 입은 먹고사는 문제다. 이상과 현실, 가치와 생존이 각각 글자 속에 들어앉아 있는 셈이다.
옛 선비들은 글자를 만들 때도 그냥 만들지 않았다. 요즘 정치인들 공약서보다 훨씬 치밀했다. 그들은 인간이란 결국 정신만으로도 살 수 없고, 밥만으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자가 굶으면 성인도 배고프고, 맹자가 밥만 먹으면 철학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좌와 우는 싸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어떤가.
좌는 자꾸 하늘만 본다. 너무 높이 보다가 가끔 땅에 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우는 땅만 본다. 금맥이라도 나올까 싶어 땅을 파다가 어느새 공동체의 뿌리까지 건드린다. 그래서 예부터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한쪽은 이상이 너무 많아 서로 다투고, 다른 한쪽은 현실 감각이 너무 많아 욕심과 타협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거대한 싸움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점이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일찍 일어나 운동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다. 그 옆에는 “오늘 하루쯤 더 자자”는 마음도 있다. 점심에 누군가를 돕고 싶다가도 손해 볼 것 같으면 망설인다. 이상과 현실, 공(工)과 입(口)의 싸움은 국회 본회의장보다 먼저 우리 가슴속에서 벌어진다.
그러니 좌우 대립을 없애겠다고 국회 의석 수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뿌리가 사람 안에 있는데 가지치기만 한다고 나무가 달라지겠는가.
여기서 생각해 볼 개념이 있다. 흔히 ‘두익(頭翼)’이라 부르는 관점이다.
사람들은 두익이라 하면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지대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래 뜻은 다르다. 머리 두(頭), 날개 익(翼)이다. 머리가 있고 날개가 있다는 말이다.
새를 보라.
독수리가 왼쪽 날개만 퍼덕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가 산에 처박힐 것이다. 오른쪽 날개만 힘껏 움직여도 결과는 같다. 그런데 양쪽 날개가 멀쩡해도 머리가 방향을 잡지 못하면 역시 추락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좌는 공동체의 정의를 말하고, 우는 경제의 활력을 말한다. 둘 다 필요하다. 정의 없는 번영은 탐욕이 되고, 번영 없는 정의는 공허한 구호가 된다. 문제는 어느 쪽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움직이느냐다.
머리가 없는 날개는 바람에 흔들리는 깃털에 불과하다.
그 머리란 무엇인가. 결국 상대를 살리려는 마음이다. 나만 옳다고 외치는 순간 이념은 종교가 되고, 나만 이익을 챙기려는 순간 현실은 정글이 된다. 사랑 없는 이상은 독선이 되고, 사랑 없는 현실은 탐욕이 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몸도 그렇다.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다. 오른손이 왼손을 향해 “너는 빨갱이 손이다” 하고, 왼손이 오른손을 향해 “너는 수구 손이다” 한다면 숟가락 하나 제대로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국가라는 몸 안에서 그 우스운 일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
이제는 “누가 옳으냐”보다 “무엇이 공동체를 살리느냐”를 물어야 한다. 상대를 제거해야 내가 산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좌는 우를 필요로 하고, 우는 좌를 필요로 한다. 마치 심장이 폐를 필요로 하고 폐가 심장을 필요로 하듯이.
새는 좌익으로도 날지 않고 우익으로도 날지 않는다.
새는 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양 날개가 함께 움직일 때 난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 머리 아닐까. 방향을 잃은 날개들의 소란스러운 퍼덕임만으로는 결코 하늘에 오를 수 없다. 분열의 시대를 건너 화합의 시대로 가려면, 이제는 날개보다 머리를 먼저 세워야 할 때다. 그것이 한자 속에 숨어 있던 옛사람들의 지혜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묵직한 질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