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칼럼] 옛사람들은 집안의 체면을 목숨처럼 여겼다. 조선시대에는 여인이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친정으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수치로 여겨졌다. 남편에게 맞고 살아도 참고 살아야 했고, 눈물은 삼켜야 미덕이라 했다. 열녀문 아래 세워진 이름들은 충절의 상징처럼 기록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 인간의 고통과 침묵이 묻혀 있었다. 시대는 바뀌고 세상은 문명화되었다지만, 인간의 의식 깊은 곳에는 여전히 “사람보다 체면이 우선”이라는 오래된 그림자가 남아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본 영화 한 장면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한 딸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친정집 문을 두드린다. 마지막으로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 안에서 돌아온 것은 위로가 아니라 차가운 시선이었다. 가족은 딸의 멍든 얼굴보다 집안의 명예를 먼저 걱정했다. “가문의 수치를 안고 왔다”는 말이 날아들고, 급기야 손찌검까지 이어진다. 신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던 집안이었다. 늘 축복과 사랑을 말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아픈 순간의 딸은 품지 못했다. 결국 딸은 보호시설을 떠돌다 삶의 끝으로 밀려난다. 영화는 묻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었는가. 아니면 자기 확신으로 만들어낸 ‘그놈의 신’이었는가.
인간은 오래전부터 신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자신의 생각과 욕망, 체면과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이름을 빌려왔다. 그래서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잔인한 전쟁도 신의 이름으로 벌어졌고, 가장 차가운 배척도 진리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다. 십자군 전쟁도 그랬고, 종교재판도 그랬다. 사랑을 가르치던 종교가 어느 순간 증오의 칼날로 변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맹신은 언제나 거창한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정의롭고 엄숙한 얼굴로 다가온다. “질서를 지켜야 한다”, “교리를 따라야 한다”, “원칙을 무너뜨려선 안 된다”는 말 속에 숨어든다. 문제는 그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규칙만 남는다는 것이다. 원래 교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어느새 사람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
지동설 시대에도 사람들은 해가 돈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의 신념을 더 굳게 믿었다. 눈앞의 진실보다 익숙한 교리가 편했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해석과 규칙을 절대화하면서 그것을 곧 신의 뜻이라 착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신을 숭배하게 된다. 결국 신앙의 이름으로 가장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맹신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맹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자신은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은 정의롭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타인을 향해 “사이비”라 손가락질하고 심판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안에 자라고 있는 미움과 배제, 우월감은 보지 못한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마음속에는 넘지 못할 담장을 세워놓는다.
오늘날 종교의 위기도 거기에 있다. 본래 모든 종교의 출발은 인간 사랑이었다.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돌보고, 죄인조차 품어 안기 위해 신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었다. 사랑은 사라지고 조직만 남았고, 생명은 사라지고 체면만 남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람을 밀어내는 일이 벌어진다. 교단을 지키려다 인간을 잃고, 교리를 지키려다 눈물 흘리는 이웃을 잃는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것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도 그렇고, 이념도 그렇고,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내가 옳다”는 확신이 강해지는 순간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심판하기 시작한다. 자기 생각에 갇히면 타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늘 명분으로 포장한 잔인함을 반복한다.
신앙이란 결국 믿을 수 있는 분을 믿으며, 믿을 수 있는 인간으로 자신을 빚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랑보다 교리를 앞세우고, 사람보다 체면을 앞세우며, 용서보다 판단을 앞세운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숭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은 사랑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사랑을 떠난 자리에서 신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신앙의 끝에서 허무를 만난다. 교회는 다녔지만 사람을 잃었고, 기도는 했지만 눈물 흘리는 이웃 하나 품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문득 이런 화두가 떠오른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만든 ‘그놈의 신’을 섬기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