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무지(無知), 가장 두려운 어둠

 


 

 

 

[이상수 칼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철학의 출발점을 열었다. 이 한마디는 인류 지성의 가장 깊은 통찰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아서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지혜를 향한 첫걸음을 내 딛는다.


반대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무지의 본질이며,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영적 어둠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있으나, 모름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스스로 옳다고 믿는 순간 무지는 교만이 되고, 교만은 결국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

 

성장의 문을 닫는 교만한 무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며 배우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모르면서도 안다 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날마다 성장하지만, 후자는 스스로 성장의 문을 닫아 버린다. 빈 그릇은 채울 수 있지만 이미 가득 찼다고 착각하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노자는 자신을 비울 때 도가 머문다고 하였고, 불가는 무명을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라 하였다. 서양 철학은 이를 지혜의 시작이라 했고, 동양 사상은 깨달음이라 불렀다.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결론은 하나이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식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 성경에서 인간의 첫 번째 타락은 단순히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한 사건이었다. 결국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었고, 교만의 뿌리에는 무지가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으나, 정작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다.

 

사랑과 공의의 조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참된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다. 부모는 자녀가 절벽으로 달려가는데도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방관하지 않는다. 붙잡고, 꾸짖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막아선다. 그 순간 자녀는 부모를 원망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 사랑 없는 공의는 차가운 심판이 되고, 공의 없는 사랑은 무책임한 방임이 된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며, 진정한 공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하나로 만난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징계를 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징계는 버림이 아니라 회복이다. 병든 가지를 잘라 내는 것은 나무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건강하게 살리기 위해서이다. 대장장이가 뜨거운 불에 쇠를 달구고 수없이 두드리는 것도 쇠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더 단단한 명검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징계 역시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의 과정이다.


우리 속담에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매는 폭력이 아니라 책임이다. 잘못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리를 외면한 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무책임이다. 무지를 그대로 두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무지에서 깨어나도록 일깨우는 것이 사랑이다.

 

현대 사회와 신앙이 직면한 무지의 위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도 지식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누구나 말하지만 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나 주장하지만 배우려 하지 않는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성찰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는데 지혜는 사라지고 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더욱 완고해졌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장 깊은 무지이다.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말씀보다 자신의 해석을 앞세우고, 진리보다 감정을 앞세우며, 양심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순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진리에서 멀어진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다시 배우려는 겸손이며, 자신을 낮추는 용기이다.


지혜의 시작은 "나는 아직 모른다."는 고백이다. 그 고백이 사람을 배우게 하고, 배우는 사람은 변화하며, 변화하는 사람은 진리에 가까워진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며 끝없이 배우려는 사람이다.

 

참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도정
무지는 죄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무지를 끝까지 붙들고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빛을 외면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묵인하는 사랑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을 파괴하는 심판이 아니다. 사랑은 공의를 통해 사람을 살리고, 공의는 사랑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킨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자유를 얻고, 공동체는 건강한 질서를 회복한다.


"참사랑이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무지에서 벗어나, 상처받은 이웃과 하늘의 아픔을 내 몸처럼 품고 살리는 희생과 책임의 길입니다. 진정한 공의는 사랑의 완성에서 오며, 사랑은 공의의 테두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꽃피우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무지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이다. 그리고 그 무지를 깨뜨리는 힘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이며, 방임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이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공의는 사랑을 잃지 않는다. 이 두 축이 함께 설 때 인간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고, 신앙은 형식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며, 그 길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