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다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극명히 갈린다. 한쪽은 ‘다시 살아난 얼굴’이고, 다른 한쪽은 ‘다시 짐을 진 얼굴’이다. 일은 여전히 삶의 중심이지만, 그 무게와 방향은 달라졌다. 직장에 다닐 때는 일이 나를 정의했지만, 이제는 내가 일을 정의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중장년 재취업 실태조사(2024)」에 따르면 55세 이상 퇴직자의 62%가 “퇴직 후 다시 일하고 싶다”고 답했으나, 그중 절반은 “무엇을 위해 일할지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다시 일한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다시 묻는 과정이다.
퇴직 이후의 일은 생존의 문제이자 존재의 문제다. 그러나 대부분은 퇴직 직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떠밀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묻기보다 ‘가능한 일’을 찾는다. 그 결과 일은 여전히 수단으로 남고, 하루의 리듬은 다시 피로로 물든다. 하지만 인생 3모작 시대의 일은 경제활동이 아니라 ‘자기 확장’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 일의 목적이 생계에서 의미로 옮겨질 때, 그 일은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 ‘자기 서사(Self-narrative)’로 변모할 것이다.
일의 재정의는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과거의 일은 조직이 부여한 임무였지만, 지금의 일은 내가 선택한 미션이어야 한다. 이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왜 하는가’가 중요하다. 필자가 공직에서 퇴직한 후 처음 맞이한 공백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매일같이 사람을 만나고 회의를 주재하던 리듬이 사라지자, ‘일이 사라진 자리’를 견디는 일이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일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리듬’이었음을. 이후 나는 그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되살리고자 사회공헌·멘토링 활동을 시작했고, 다시금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새로운 일의 형태는 이미 세대와 산업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고 있다. 프리랜스, 사회적기업, 지역 협동조합, 디지털 크리에이터 등은 퇴직자의 삶을 다시 무대 위로 올려놓고 있다. 통계청 「고령층 경제활동조사(2024)」에 따르면 60세 이상 근로자 중 41%가 ‘자영업·프리랜스 형태’로 일하고 있으며, 그중 35%는 “경제보다 보람이 더 크다”고 답했다. 일의 형태가 아니라 일의 감정이 달라진 것이다. 스스로 기획하고, 배우며, 나누는 일은 ‘노년의 노동’이 아닌 ‘두 번째 성장’의 무대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일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일의 철학을 다시 써야 한다. 퇴직 후의 일은 ‘조직에 속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실현하는 일’이 되어야 하며, 그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직업(Job)이 아니라 직능(Competence)과 정체성(Identity)의 결합이다. 일을 통해 사회적 유용성을 증명하고 동시에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현역’으로 남을 것이다. 반대로 이 전환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일의 공백’이 ‘자존의 붕괴’로 이어지는 냉혹한 현실을 맞게 될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기업도 제도의 방향을 재설계해야 한다. 단기 재취업 중심의 전직지원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퇴직 전 5년부터 개인이 스스로 일의 방향을 설계할 수 있도록 ‘경력전환 멘토링’, ‘사회공헌형 일자리’, ‘디지털 창업 교육’ 등 다층적 경로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인생 3모작 시대의 일은 단순한 노동의 연장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자아실현이 교차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퇴직 이후의 일은 나이를 거슬러 ‘가능성의 무대’를 다시 여는 일이다. 일은 여전히 삶을 움직이는 에너지이지만, 그 에너지를 어디로 흘려보낼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시 일할 이유를 찾은 사람은 불안 대신 설렘으로 하루를 맞이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의미의 늪’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이제 독자에게 묻고 싶다.
- 나는 지금 왜 일하고 싶은가,
- 나의 경험이 사회와 연결되는 구체적 통로가 있는가,
- 내가 원하는 일의 형태(근로·프리랜스·공헌활동 등)를 알고 있는가,
- 나에게 일이란 단순한 소득원이 아니라 의미의 표현인가,
- 일하지 않아도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다섯 질문 중 두 가지 이상이 ‘아니오’라면, 당신의 일은 아직 재정의되지 않은 것이다.
퇴직은 일의 끝이 아니라, 일의 정의를 새로 쓰는 시점이다. 과거의 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였지만, 이제의 일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선택이 될 것이다. 자신의 일을 다시 정의한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성장할 수 있으며, 그들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 될 것이다. 다시 일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은 퇴직 이후의 삶에서 방향을 잃을 것이며, 반대로 의미를 찾아 일하는 사람은 나이를 넘어 ‘미래의 현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일의 재정의는 생존의 선택이자, 존재의 선언이 될 것이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메일 charly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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